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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상 없는 추석 - 결혼 30년만에 처음 느끼는 한가로운 명절일상 2022. 9. 10. 04:03
명절은 즐거운 날입니다. 특히 추석 명절은 날씨도 청명하고 먹거리도 풍성한 시기라 제가 좋아하는 날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올해는 추석 차례상을 차리지 않기로 했답니다. 덕분에 30년 결혼생활 중 처음으로 한가롭고 여유로운 추석을 보내게 되었네요.
캐나다에 이민 와서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캐나다는 휴일이 아니니까 출근하는 아이들이 절이라도 하려면 상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차려야 했죠. 장남인 남편과 저, 아이 둘 이렇게 네 명이 돌아가며 잔 올리고 절하고 나면 그야말로 '잔치 끝'이 되었죠. 친척도 없는 타지에서 후다닥 끝나버리는 명절 차례가 허무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더구나 차례음식을 요즘 사람들은 잘 안 먹죠. 많은 양을 만들지는 않지만 구색을 위해 먹지도 않는 남은 음식들을 일주일 내내 처리하는 것은 남편과 제 몫이었답니다.
그리고는 휴대폰으로 차례상을 찍어서 한국과 미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는 거죠. 모두들 애썼다고 수고했다고 진심으로 말은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왠지 숙제 검사를 받고 난 기분이 들곤 했죠. 저도 물론 싫어서 억지로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편도 잘 알 겁니다. 생전에 아버님은 저에게 다정한 분이셨기 때문에 기일이나 차례를 지낼 때 뵙는 영정사진을 보면 아직도 울컥합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기분이 들곤 하는 건지...
남편도 말은 안 했지만 저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무서운 물가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며칠 전에 뜬금없이 올해는 차례상을 차리지 말자고 하더군요. 밴쿠버의 물가도 한국 못지않게 많이 올랐습니다. 장보기 겁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게 문제가 생겼답니다. 한포진! 한포진으로 작년 여름에 심하게 고생했는데 올여름에 조금씩 다시 물집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다시 재발이 되었네요. 지금도 손가락 사이와 손가락 끝의 피부가 물집이 잡히고 벗겨지고 쓰려서 일상적인 집안 일도 조금 힘든 상황이 되었죠.
저도 참 답답한 사람이기는 해요. 손이 이지경이면 먼저 추석상 차리지 말자고 말할 법도 한데 남편이 말하기 전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답니다. 어쩌면 남편이 영리한 사람 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출근하고 나면 장보고 일할 사람이 저희 둘인데 제 손이 이러니 모두 다 본인 몫으로 일이 돌아갈 것이 뻔하죠. 나름 결단을 내린 것이겠죠. 고맙죠. 아버님께는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차례음식이라는 것이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힘들게 생활할 때 일 년에 몇 번 기름진 음식 많이 해서 나눠 먹고 가족 간에 우애를 다지자는 뜻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탄수화물에다 기름진 음식들이 많아 영양과잉인 요즘 사람들에게는 그리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죠.
한국 뉴스를 보니 올해는 태풍의 영향도 있고 치솟은 물가 때문에 상 차리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하더군요. 더구나 차례음식 만들어서 파는 회사도 적자라서 아예 올해는 문을 닫겠다고 하는 보도도 보았습니다. 또 마음 아프게도 수해를 입은 분들도 많은 추석이라 차례상 걱정이 한낱 사치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전통을 지키는 일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전통이 오랜 시간 이어지려면 시대가 변하는 만큼 합의점을 찾아야겠지요. 소비되지 않을 음식을 굳이 전통이라는 이유로 만들어야 하고 냉동실에 굴리다 버리게 되는 낭비를 생각하면 조금 유연하게 현명한 상차림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도 잠깐 멈출 수 있는 여유를 갖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적어 봅니다. 세대가 넘어가고 우리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기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형식은 바뀐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결혼 30년 만에 차례상 없는 추석을 보내려니 한가롭기는 하지만 좀 서운하기도 합니다. 얼른 마트에 가서 송편이라도 사 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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